상계 — 서로 진 빚을 대등액에서 없애는 법
서로가 서로에게 갚아야 할 돈이 있는 상황은 생각보다 흔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받을 돈이 있고, 동시에 상대에게 물어줄 돈도 있다면, 각자 전액을 주고받는 대신 겹치는 액수만큼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민법이 정한 상계입니다. 소송이나 강제집행까지 가지 않고도 채권·채무를 간명하게 청산하는 수단이라 실무에서 매우 자주 쓰입니다. 요건과 효과, 그리고 상계가 막히는 경우를 차례로 정리합니다.
상계란 무엇이고, 언제 할 수 있나
먼저 용어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상계를 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채권을 자동채권이라 하고, 상계로 소멸시키려는 상대방의 채권을 수동채권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채권이 맞물릴 때 상계가 이루어집니다.
민법 제492조 제1항은 상계의 요건을 이렇게 정합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두 사람이 서로 상대에게 채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두 채권의 대립).
- 두 채무가 같은 종류를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금전채권끼리가 그렇습니다.
- 쌍방 채무의 이행기가 도래해야 합니다.
- 이때 각 채무자는 대등액, 곧 서로 겹치는 액수만큼 상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채무의 성질이 상계를 허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상계할 수 없습니다(제492조 제1항 단서). 또 당사자가 미리 상계하지 않기로 하는 다른 의사표시(상계 배제 특약)를 해 둘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상계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특약이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선의의 제3자에게는 대항하지 못합니다(제492조 제2항).
상계하는 방법과 그 효과
상계는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 합니다(제493조 제1항). 재판을 거치거나 상대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계하겠다는 뜻을 상대방에게 표시하면 됩니다. 다만 이 의사표시에는 조건이나 기한을 붙일 수 없습니다(같은 항). '이러이러하면 그때 상계한다'는 식의 조건부 상계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효과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소급효입니다. 상계의 의사표시는 각 채무가 상계할 수 있었던 때 — 이를 상계적상이라고 합니다 — 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시점에 대등액에 관하여 소멸한 것으로 봅니다(제493조 제2항). 즉 상계하겠다고 밝힌 시점이 아니라, 두 채권이 상계할 수 있게 된 그 시점을 기준으로 채권·채무가 정리됩니다. 이 소급효 때문에 그 시점 이후에 쌓이는 이자나 지연손해금 계산이 달라지므로, 실무에서는 상계적상 시점을 언제로 볼지가 자주 다툼의 대상이 됩니다.
시효가 지난 내 채권으로도 상계할 수 있나
받을 돈의 소멸시효가 이미 지나 버렸다면, 그 채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민법 제495조는 예외를 둡니다.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이라도, 그 완성 전에 이미 상계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그 채권자는 그 채권으로 상계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두 채권이 서로 상계할 수 있는 상태에 한 번 이르렀다면, 당사자로서는 '언젠가 상계로 정리되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신뢰를 보호하기 위해, 뒤늦게 한쪽 채권의 시효가 지났더라도 상계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다만 시효 완성 전에 이미 상계적상에 있었어야 한다는 조건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상계가 막히는 경우
상계는 편리한 수단이지만 언제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이 상계를 명시적으로 막는 대표적인 두 경우가 있습니다.
고의의 불법행위로 생긴 빚 (제496조)
누군가에게 고의의 불법행위로 손해를 입혀 배상할 의무를 지게 된 사람은, 그 손해배상채무를 수동채권으로 삼아 상계로 채권자(피해자)에게 대항하지 못합니다(제496조). 예를 들어 고의로 남에게 피해를 준 가해자가 '나도 그 사람에게 받을 돈이 있으니 상계로 정리하자'고 주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피해자가 실제로 배상을 받도록 보장하려는 규정입니다. 조문은 '고의'의 불법행위에 한정하고 있습니다.
압류된 채권을 수동채권으로 한 상계 (제498조)
지급을 금지하는 명령(가령 채권압류·가압류)을 받은 제3채무자는, 그 명령을 받은 뒤에 취득한 채권으로 상계하여 그 명령을 신청한 채권자에게 대항하지 못합니다(제498조). 압류가 이루어진 다음에 뒤늦게 반대채권을 마련해 상계로 압류의 효력을 무력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정입니다.
실무에서 챙겨야 할 점
상계는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 효력이 생기므로, 그 의사표시가 상대방에게 도달했는지, 언제 도달했는지를 확인하고 증거로 남겨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용증명우편 등으로 상계의 뜻과 대상이 되는 채권을 특정해 통지해 두면 뒷날의 다툼을 줄일 수 있습니다.
또 앞서 본 소급효 때문에, 상계가 인정되면 상계적상 시점 이후의 이자와 지연손해금 계산이 함께 달라집니다. 얼마를,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정산할지가 결국 받을 금액과 물어줄 금액을 좌우하므로, 상계적상이 언제 성립했는지를 꼼꼼히 따져야 합니다.
반대로 상대방이 상계를 주장해 오는 경우라면, 두 채권이 정말 같은 종류인지, 쌍방 이행기가 도래했는지, 상계가 금지되는 채권은 아닌지(고의의 불법행위로 생긴 채무, 압류된 채권 등)를 하나씩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주 받는 질문
빌려준 돈과 물어줄 돈을 서로 없앨 수 있나요(상계)?
내가 상대에게 받을 돈이 있고 상대도 나에게 받을 돈이 있으면, 두 채권이 같은 종류(대표적으로 금전)이고 쌍방 채무의 이행기가 도래한 때 겹치는 액수(대등액)만큼 상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492조). 다만 채무의 성질상 상계가 허용되지 않거나 상계를 배제하는 특약이 있으면 상계할 수 없습니다.
상대가 동의하지 않아도 상계되나요(일방적 의사표시)?
상계는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 의사표시로 하며, 상대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습니다(민법 제493조 제1항). 다만 그 의사표시에는 조건이나 기한을 붙일 수 없고, 의사표시가 상대방에게 도달해야 효력이 생기므로 도달 여부와 시점을 증거로 남겨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효가 지난 내 채권으로 상계할 수 있나요?
원칙적으로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으로는 권리를 행사하기 어렵지만, 그 채권이 시효 완성 전에 이미 상계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상계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495조). 즉 시효가 지나기 전에 이미 두 채권이 상계할 수 있는 상태(상계적상)에 있었어야 합니다.
고의로 사고 낸 사람이 상대에게 받을 돈으로 상계할 수 있나요?
고의의 불법행위로 손해배상채무를 지게 된 사람은 그 채무를 수동채권으로 삼아 상계로 상대방에게 대항할 수 없습니다(민법 제496조). 피해자가 실제로 배상을 받도록 하기 위한 규정으로, 조문은 '고의'의 불법행위에 한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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